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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제주도

성읍민속마을, 과거로의 여행

성읍민속마을 주차장이 여러 곳에 있다.
"성읍민속마을 공영주차장" 또는 "성읍리 778"을 입력하면 남문 바로 옆이다.

민속마을 입장료는 없다.

성읍민속마을

성읍리는 500년간 제주도를 3현으로 나누어 통치했을 때, 정의현의 도읍지였다.
제주도 옛 민가의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고유한 생활 풍습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조선시대 때, 제주도의 3개의 큰 고을은 제주목, 대정현, 정의현이었다.

조선 초 제주에는 한라산 북쪽 한 곳에만 관아가 있어 남쪽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관아를 왕래하는데 불편이 많았다.
이에 태종 16년(1416) 한라산 남쪽 약 36km를 동서로 나누어 동쪽에는 정의현, 서쪽에는 대정현을 설치하고 조선 후기까지 유지했다.

그 중 정의현은 처음에 성산 고성리에 위치했으나 외진 곳이어서 세종 5년(1423)에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읍성의 규모는 동서 160m, 남북 140m, 둘레 약 1,200m에 달하며 높이는 약 3m 정도이고, 남쪽, 동쪽, 서쪽 세 군데에 성문이 있다.
방어 시설로는, 바깥쪽으로 돌출된 7자 형태의 옹성과 성문을 이용했다.

돌출된 옹성

 서문 밖에도 민속마을 분위기다.
성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이 곳을 둘러본다.

발길 닿는대로 편하게 둘러볼 생각이다.

새끼줄, 말방아, 땔감, 장독...
초가집에서 발길이 멈춘다.
새끼로 엮은 초가지붕, 돌과 진흙으로 빚은 벽을 보니 아득한 과거로의 여행을 가게 된다.

따뜻한 아랫목, 군불,
낮은 부엌, 시원한 부뚜막, 가마솥,
메주 냄새, 샘물...

서문 앞에 ''자로 꺾어 성벽을 높고 두껍게 쌓은 것이 보인다.
성문을 무기로 공격하거나 돌진하지 못하게 하고, 출입자를 통제하기에도 좋은 구조다.
그리고 ''자로 꺾여진 입구가 남쪽으로 트여 있어서 차가운 북풍을 막아주게 된다.
(※동문의 '자가 북쪽으로 트인 걸 봐서는 다른 이유로 방향을 정했던 모양이다.)

서문 위에서 ''자로 꺾여진 아래를 통제하기 쉽다.

서문 안쪽이다.
안에서 빗장으로 문을 잠그게 되어 있다. 위에서 출입자를 확인 후 열어주도록 통제했을 것 같다.

서문 안으로 들어가면 정의향교가 왼쪽에 자리하고 있다.

정의향교 정문이다.

정의향교 대성전

정의향교는 세종5년(1423)에 다른 곳에 창건되었다가, 헌종 15년(1849) 현 위치에 옮겨졌다고 한다.
30여명의 유생을 가르치다가 뒤에는 선현에 대한 제사를 지내는 장소로 더 많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성읍마을(카카오맵)

성읍마을 지도다.
왼쪽 서문과 정의향교에서 가운데로 가면 조일훈 가옥 위 넓은 마당이 있는 건물이 정의현 객사다.

정의현 객사. 좌우측 건물은 별도의 벽체로 지었다.

정의현 객사

정의현 객사의 기능은 크게 두 가지인데,
1. 지방관이 임금에게 초하루와 보름에 정기적으로 배례를 올리는 곳이고,
2. 중앙관리가 내려왔을 때 이 곳에 머무는 숙소로서의 기능이다.

객사 건물은 이처럼 영빈관의 기능을 하면서 경로잔치나 연회를 베푸는 곳으로도 사용되었다.

정의현 객사. 본관 좌우에 있는 건물은 본건물과 지붕은 연결되어있지만 별도의 벽체로 지어졌다.

객사 가운데 건물은 연회를 베푼 큰 홀일 것 같은데,
내부를 볼 수 없었고, 좌우측 건물은 각각 대청마루와 방이 하나 있다.

정의현 객사 오른쪽 옆 건물이다. ㄴ자형 마루가 방의 3배 크기이다.

 

정의현 객사 문간채

마당을 사이에 두고 위치한 문간채다.
여기는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모르지만...
통상 출입문 기능과 창고, 하인들이 머무는 숙소로 사용된다.

한봉일 고택

한봉일 고택은 19세기 초에 건립 된 것으로 보이며, 동문 안쪽에 성벽을 끼고 있다. 주변 경관과 이문간 (대문간) 밖의 팽나무가 아늑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이문간은 헛간과 쉐막(외양간)을 갖추고 있으며, 안거리와 밖거리가 마주보고 있다. 안거리에는 재래식 온돌인 '굴묵'이 있는데, 굴묵으로 통하는 다른 칸을 두지 않고 난간 쪽을 이용하여 출입하는 한라산 남쪽 지역의 가옥 구조가 잘 드러난다.
3칸 집인 밖거리의 상방(대청마루) 뒤쪽에 작은 구들을 배치한 점이 특이하다.

나무문으로 닫혀진 곳 가운데에 상방(대청마루)이다. 이 곳을 중심으로 방들과 부엌이 좌우측에 연결되어 있다.
제주도에서는 집의 중심이 상방인 듯하다.

작은방이다. 붙박이칸이 있는데, 통상 붙박이 아래에 군불을 지피는 아궁이가 있다.

부엌
방 뒤쪽 공간

초가집은 못사는집이란 인식을 가졌었는데... 초가집에 기품이 있다. 흙벽과 지붕은 오히려 단열도 잘되고 건강에도 좋을 것 같다.

마을 골목 둘러보기~~↓

팽나무

수령 600년이 넘은 팽나무. 크기와 자태가 세월을 느끼게 한다.

남문

남문과 성곽이다.
성곽의 길이, 폭, 높이가 대단하다.
요즘시대에 장비를 이용해도 축성이 쉽지 않을 것 같다.

 남문이다. 서문과 비슷한 구조이다.
자형의 축대가 성문의 정면을 보호하고 있다.

남문 성곽의 안쪽 전경이다.
성곽의 높이가 초가지붕의 높이보다 높고,
초가집 돌담의 높이도 바람을 피하려는 듯 높다.

도로의 모양은
성곽 밖의 경우 평지 마을에서 자주 쓰이는 둥근고리꼴 길을 만들고
성곽 안에는 고을에서 보통 쓰는 ‘우’자꼴 길을 기본으로 삼는다.
’자의 에는 고을에서 가장 중요한 관아를 두고 는 동서길이 되며 는 남문로에 해당한다.

고평오 고택

고평오 고택 대문

고평오 고택은 18세기 말에 지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마당을 중심으로 안거리(안채)와 밖거리 (바깥채)가 마주하여 서 있고, 마당 동쪽에 모커리 (안거리와 밖거리 사이에 가로 놓인 집채)가 있다. 마당 서쪽에도 모커리가 있어서 자형으로 배치되어 있었으나 1970년대 중반에 헐렸다.
안거리는 3 칸으로 왼쪽에 정지 부엌, 오른쪽에는 안방과 고팡 고방을 두었다.
중앙의 상방 대청에 호령창이라는 쌍여닫이 창이 따로 달려 있는데 이는 제주도 남부 일부 지방에서만 볼 수 있는 가옥형태이다.
밖거리는 정의 고을 당시부터 면사무소가 표선리로 옮겨지던 근래까지 관원들이 숙식하던 곳이었다고 하며, 제주도의 여느 집 구조와는 다르게 상방(대청 마루)이 동쪽으로 치우쳐져 있고 연이어 2칸의 방을 두었다.

고평오 고택 대문을 들어서면 밖거리와 모커리 사이로 마당과 안거리가 보인다.
고평오 고택 안거리

제주도는 창호지문보다 나무문을 많이 사용하는 것 같다.

고평오 고택 왼쪽 끝 공간
고평오 고택 상방(대청마루). 빛이 새어들어오는 곳이 뒷문이고, 왼쪽에 정지와 작은 방, 오른쪽에 방이 있다.
고평오 고택 안거리 뒷면
고평오 고택 모커리
고평오 고택 밖거리
고평오 고택 밖거리 방
고평오 고택 화장실. 안거리와 모커리 뒤에 있다. 초가로 이은 돼지우리가 붙어 있다.

원님물통. 쉽게 말해 우물이다.
일반 서민의 사용을 통제하고 관아에서 사용하여 원님물통이라 불렀다. 남쪽에 위치해서 남문물이라고도 했다.
인근 노드리방죽에서 나무를 묻어 물이 타고 흘러 들어오게 했고, 오면서 걸러지게 되어 식수로도 사용했다고 한다.

객주집

객주집은 예전 정의 고을의 객사 앞에 자리하고 있으며, 본래 객주 집이었다고 전해진다.
넓은 대지에 안거리, 밖거리, 모커리, 창고, 이문간 (대문간) 등 다섯 채의 건물이 마당을 중심으로 ㅁ자형으로 알맞게 배치되어 있다.
안거리는 전형적인 제주도의 3칸 집이며, 전면에 풍채(차양)가 설치되어 있고, 밖거리는 안채와 비슷한 구성을 하고 있으며
이문간에 가까운 2칸은 헛간이다.
18세기 말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이 가옥은 정의 고을의 중심가에 있으면서 제주 농가의 구조를 갖추었으며, 객주집으로 이용되었다는 점에서 당시의 생활사를 잘 보여준다.

객주집 이문간(대문간)
객주집 안거리
객주집 부엌
객주집 헛간. 말을 쉬게하는 곳으로 사용한 듯...

 

 노다리 (노드리) 방죽 ↑
'노드리'는 '나들이'가 음운 변화하여 현재의 지명이 되었다. 관청에 원정, 소지 등을 들인 사람들이 거간과 만나 의논하던 곳이며, 관속들이 쉬던 곳이기도 하다.
남문에서 객사에 이르는 직선 길에 있다.
사각형의 물통으로 예전에는 여기에 창포를 심어 길렀으며 여자들이나 기생들이 머리를 감을 때 사용하였다고 한다.
※ 원정 : 억울한 사정을 하소연 함
※ 소지 : 청원 할 것이 있을 때 관청에 내던 서면 글

근민헌

 

근민헌은 정의 현감이 사무를 보던 청사로서 현재의 군청과 같은 역할을 하는 건물이다.
처음 정의현의 치소(행정 사무를 맡아 보는 기관이 있는 곳)는 성산면 고성리에 있었으나, 왜구의 침입이 잦아 조선 세종 5년 1423에 지금의 위치로 옮기고 석성을 쌓았다.
이 고을은 1914년 정의군과 대정군이 폐지되어 남제주군에 합병될 때까지 정의현의 중심이었다.
이 건물은 옛 건물을 헐고 조선 시대의 건물을 고증하여 2014년에 복원 한 것이다.

생각보다 작은 공간이다.
넓은 대청마루 양쪽에 작은 방문이 두개씩 있다.


전시용 집들과 거주하는 집이 섞여 있다.
식당들이 꽤 많다.

표적을 맞추는 놀이기구인 듯...

볏집이 아니고 새(억새)로 만든 지붕의 샘플이 많이 보인다. 제주도는 논농사가 적어서 새를 많이 사용했을 것이다.

헛간채, 마굿간

마당을 사이에 두고 안거리(본체)와 헛간채가 마주보는 구조가 많이 보인다.

고창환 고택

고창환 고택
정의향교 옆에 있으며, 19세기 초에 세워졌다. 20세기 초에 여인숙으로 쓰인 적이 있어 '여관집'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여관의 형태는 찾아볼 수 없다.
마당을 사이에 두고 안거리와 헛간채가 마주하고 있다.
큰 길에서 올레길로 들어가면 정낭(대문 대신 가로로 걸쳐놓는 3단 나무)도 없이 마당으로 들어간다.
안거리는 전형적인 3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고창환 고택 전면, 그리고 마당, 맞은 편에는 헛간이 있다.

 

고창환 고택 헛간
고창환 고택 헛간 내부

 

고창환 고택 안거리. 왼쪽 부엌과 들마루와 방이다.
고창환 고택 안거리의 오른쪽 끝 부분이다.

아궁이 위에 붙박이장이 튀어나와 있다.
공간 절약의 지혜가 엿보이지만...
군불을 뗄 때 연기가 매워서 고생이겠고
활동하기 불편할 정도로 좁다

고창환 고택 안거리 상방(대청마루)
고창환 고택 정지(부엌)

 

고창환 고택 뒷뜰

고창환 고택 뒷뜰이다.
자연적인 바위를 그대로 남겨두고 장독대 등으로 썼을 것 같다.
돌과 진흙으로 된 벽체가 무척 두꺼워 단열이 잘 될 것 같다.

성읍민속마을은 과거 선조들의 삶을 엿볼 수 있고 많은 것을 느끼게 해준다.